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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사찰

by 난 그림자 2017. 3. 1.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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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대의 비구니 강원이 있는 운문사는 물 맑고 산 깊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운문사에서 흘러나간 운문천 밑으로 운문댐이 생기면서 맑은 시냇물과 호젓한 마을을 스쳐가던 풍광은 사라져 버렸다. 이 길을 따라 북쪽에서 호거산으로 진입하면 아름드리 소나무 밭을 지나 운문사 뜨락에 들어설 수 있다. 새로 지은 대웅보전 앞에서 보면 북쪽의 바위산을 호랑이 머리로 삼고 그 몸이 동쪽으로 해서 남쪽으로 뻗으며 둥글게 운문사를 감싸고 있으니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에서 호가산을 따온 것이리라.

산으로 둘러싼 너른 분지에 남향으로 절을 배치했으니 지금도 25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으로 불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고 비구니스님 특유의 정갈하고 깔끔한 분위기를 담아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운문사는 어느 도승이 고구려 평원왕 2년(560년)에 가운데에 자리 잡은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사방에 네 개의 작은 절을 창건하고 오갑사라 부른데서 부터 출발한다. 그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이고 591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며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준 것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 후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보양스님이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다시 대대적 중창을 이루게 되니 왕건은 이 오갑의 땅 500결을 절에 내려주고 937년에는 운문선사라는 이름도 내려주게 된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내려오게 되고 그 출처는 바로 중국의 운문스님이다. 「운문어록」이라는 책을 남긴 운문문언(864~949)스님은 운문산에 오래 머물던 스님으로 선종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이 절 이름을 내려줄 당시 중국에서 크게 선풍을 드날리고 있었기에 왕건은 과감히 살아있는 스님의 법호를 쓴 것이다.

이렇게 고려왕조 창업에 한몫 거들어 세력이 커진 운문사는 원응국사(1052~1144)때 전성기를 맞는다. 1129년에 원응국사가 운문사로 내려오자 나라에서 다시 토지 200결과 노비 500명을 내렸으니 500의 선종사찰 가운데 제2사찰이 되었다. 그 후 몽고의 간섭이 노골화되는 1277년 일연스님이 이곳에 내려와 1282년 다시 충렬왕의 부름으로 떠날 때까지 영원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된다.

조선시대에는 여느 사찰들처럼 임진왜란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이를 다시 대대적으로 중창한 스님은 설송대사이다. 이때 지은 사적기가 숙종 44년(1718년)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니 바로 이 무렵에 운문사는 재건되었다고 하겠다. 운문사의 건물 중에는 비로전이 가장 오랜 건축물인데 1653년에 중건된 기록이 확실하고 아름다운 꽃살문, 연꽃과 국화를 아로새긴 수미단, 견실한 건축기법 등으로 보물 제678호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석등, 석탑, 석불 등 6점의 문화재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만세루 옆에 있는 처진 소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이 되는 나무로 멀리서 보면 마치 우산처럼 생기어서 운무사의 운치를 더해준다.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운문사 관음전은 1105년 원응국사가 3번째 중창한 건물이라고 하나 운문사 전체가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었음으로 그 후 중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관세음보살상 뒤에 걸려있는 관세음보살탱화가 1868년에 그려진 것이고 설송스님이 대대적으로 운문사를 중창한 때도 1700년도 초기였기 때문에 관음전도 이때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수미단에 새겨진 조각의 솜씨들도 더 빠른 시기의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은 글자 그래도 모든 중생들의 소리를 관해서 고통을 없애주고 기쁨을 주는 보살이다. 사는 곳이 남쪽의 바닷가 보타낙가산이라고 하며 중생의 간절한 기도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명칭도 여러 가지이다. 흔히 흰 옷을 입은 백의관음이 물가에 앉아있는 그림이 많고 용을 타고 있는 용두관음도 보인다. 운문사 관음전 수미단은 상, 중, 하대로 되어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징도 지니고 있다.

우선 하대에는 족대 3칸을 배치하고 족대 사이에 용 한 마리씩을 족가하였는데 당초문양 풀줄기를 입에 물고 있다. 특이하게도 가운데 용은 그 머리 부분이 앞으로 돌출되도록 조각하였는데 이는 앞서 말한대로 관세음보살이 살고 있는 곳인 남쪽 바닷가와 연관이 있다. 의상대사가 낙산사에서 기도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동해용왕에게 여의보주를 얻었듯이 용왕은 관세음보살의시종임으로 용의 조각을 이런 식으로 배치하여 수미단 전체를 배로 삼아 중생을 극락으로 건네주는 반야용선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대 양쪽 끝족으로 거북이 두 마리를 돌출하도록 조각한 것이다. 물에 사는 거북을 이렇게 배치함으로서 화재로부터 법당을 보호하고 용을 배치함으로서 중생의 고통을 건져주는 관세음보살의 능력을 다시 한 번 강조코자 한 것이다.

중대 정면 하단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색깔의 연꽃이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으로만 새겨져있다. 그 사이사이를 연꽃 줄기가 감싸고 물고기와 거북, 도롱뇽이 여기저기 숨겨져 있다. 어떤 거북은 연꽃 속에도 숨겨져 있는데 어찌 보면 꽃들이 너무 도상화되어 생동감이 많이 떨어진다.

중대 정면 중단에는 모란과 다람쥐가 어우러졌는데 왼쪽 첫 칸에 거미와 개구리가 보이고 있다. 이 중단은 3칸으로 나누어졌는데 각 칸마다 2마리의 다람쥐가 정답게 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부부화합과 자손창성이라는 백성들의 바람을 반영한 것으로 추측된다. 가운데 칸 정중앙에는 모란이 앞쪽으로 피었고 양쪽으로는 같은 구도의 모란꽃이 줄기를 뻗어가며 피어나고 있다.

중대 정면 상단은 국화꽃 만 8송이를 동그란 모양으로 나란히 배치했다. 색깔만 다를 뿐 마치 국화빵 찍어내듯이 똑같은 형태로 조각하였는데 양쪽 끝에 있는 흰 국화 두 송이 만 잎에 약간씩 가리워져 있다. 중대 전체로 볼 때는 하단에 연꽃과 수중생물, 중단에는 모란과 지상생물, 상단에는 절개의 상징인 국화꽃만 배치하여 불교와 유교의 가치개념을 함께 아우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좌측면 하대에는 한 칸의 족대를 중앙부에 설치하고 족대 사이에는 용의 얼굴 대신 당초문이 조각되어 있다. 좌측면 중대도 역시 상·중·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단의 조각 내용은 정면의 중대와 동일하다. 곧 하단에는 연꽃 세 송이를 위에서 내려다 본 형태로 나란히 배치하고 그 사이로 연꽃줄기를 조각하였다. 물고기, 거북, 도롱뇽 등의 물속생물들이 부분 부분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화재를 예방하며 부처님 설법을 듣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중단에는 막 피어나는 모란꽃 네 송이를 배치했고 상단에는 국화꽃 세 송이를 일정한 간격을 띄워 동그란 형태로 조각해 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청도 운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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