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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북문

유적지

by 난 그림자 2017. 6. 1. 0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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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곳 동래읍성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시기는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 초기이다.

왜군은 선조 25년 음력 4월 13일 오후 5시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증산1) 아래에 있던 부산진성을 공격했다. 이때 부산진성에서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왜군과 대항했으나 성은 무너졌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동래읍성으로 진격해 “싸우려거든 싸우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했으나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며 끝내 항쟁을 계속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개에도 불구하고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 무장한 왜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 송상현은 성이 끝내 함락되자 관복을 입고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순국했다. 이후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동래읍성은 거의 관리되지 않다가, 영조 7년(1731)에 동문·서문·남문·북문·인생문과 암문, 그리고 곳곳에 장대와 망루를 세워 이전보다 더 큰 규모로 성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북문과 북문 주변에 복원된 성터뿐이다. 서문과 남문 그리고 부근의 성곽들은 일제 때 파괴되고, 남문에서 동문까지도 차츰 주택지로 변해 옛 모습을 잃게 된 까닭이다.

동래읍성터를 제대로 보려면 동래향교 뒤편에서 시작해 서장대·북문·북장대·마안산공원 그리고 인생문터까지 이어 조성한 ‘역사의 산책로’가 정식 코스이긴 하지만, 부산광역시립박물관 복천분관에서 오솔길을 따라 산길을 올라가며 마안산공원과 북장대, 북문을 거치고 북문에서 길을 틀어 다시 박물관으로 내려오는 짧은 코스도 나쁘지 않다. 충렬사 뒷산에는 동장대와 주변 성곽도 일부 남아 있지만, 이곳은 따로 떨어져 있어 충렬사에서 다시 출발해 찾아가야 한다. 충렬사는 동래부사 송상현을 기리는 사당이며, 부산진성에서 순사한 부산진첨사 충장공 정발도 함께 기리고 있다.

찾아 가시는길은 고분 박물관 입력하시면됩니다 주차장도 있습니다

주차를 하시고 복천 박물관으로 향하시면 됩니다











친구 참 좋은것이죠 ...

길랑이도 함께 햇습니다

여기서 처음 만난분이고 친절하게도 일출이 된다는 말씀을해주셧고

사진찍는다고 허락을 받아 찍은사진입니다

모델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혹시나 보신다면 사진 보내드릴게요

본인이 아롱이라고 말씀을 해주셧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 과학자, 장영실
장영실은 조선 전기 세종 때 활동하던 과학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한 사람이야. 원래 장영실은 경상도 동래현 관아 기생의 아들로 태어났어. 그런데 조선 시대에는 어머니가 기생이면 자식은 노비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장영실은 관청의 노비로 살았지.

여러 가지 물건을 고치는 재주가 뛰어났던 장영실은 노비 생활을 하며 관아의 기구들을 과학적으로 바꾸고, 영남 지방의 가뭄을 이겨 내는 데 재주를 발휘해 마침내 멀리 한양의 궁궐에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게 되었어. 그러던 중 신분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찾던 세종 대왕에게 발탁되어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었어.

[네이버 지식백과] 장영실 - 세종이 사랑한 조선 최고의 발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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